최원영이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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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밀 문성모 : 한국 교회 게토화, 그들만의 리그

wy 0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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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밀 문성모 목사님을 처음 만난 지 50년이 넘었다. 

 

'세상에 이렇게 점잖은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과묵하면서도 간혹 초탈하게 허허 웃는 모습은, 당시 20대 초반의 학생들과 결이 달랐다.

 

문 목사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행적을 보면 오직 진실된 삶을 추구한 인생이었다. 

 

그에게 다재다능이란 표현은 부족하다. 

 

서울 장신대 총장을 지낸 교육자로서, 독일에서 예배학과 음악을 공부한 석학으로서,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으로서, 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로서, 캘리그래피 전시회를 여는 서예가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또 그는 한국 예배가 서구 음악에 국한된 점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 가락 찬송가 400여 곡을 만들었다. 

 

앞으로 1000곡까지 작곡할 생각인데 1주일에 한 곡을 만든다 해도 15년 후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그의 곡이 3곡 들어가 있다. 

 

이러한 업적이나 성취도 대단하지만, 나는 인간 문성모 님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는 험난한 세상에서 무슨 일이든 믿고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진리의 인간이다. 

 

목사 안수 40주년인 작년에 담임목사를 은퇴하고 종로의 조용한 사무실에서 찬송가 작곡에 몰두하고 있는 문성모 목사님을 만났다. 

 


  

Q: 문성모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은 예배와 음악의 한국화라는 신학적 과제가 평생의 화두 같은데 무슨 뜻인가요?

 

A:저는 작곡이 전공인데, 서양음악과 국악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서울예고 시절 서양음악을 배우고, 서울음대 국악과에서는 우리 전통음악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로회신학대학 신대원에 진학하여 신학 공부를 하면서 한국교회 예배와 음악이 미국 교회의 판박이라는 것을 처음 자각했습니다.

 

그후 독일로 유학을 와서 보니까 독일 교회는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독일식의 예배와 음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교회나 인도나 그 밖의 모든 나라의 교회는 그들만의 고유한 예배형식과 찬송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도 한국적인 예배와 한국적인 찬송으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평생 주장하고 살았습니다

 

강연, 논문, 작곡, 목회, 신학교 행정 등을 통하여 이것을 조금이나마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Q: 찬송가 천 곡을 만들 계획은 어떻게 시작 하셨나요?

 

A: 저는 우선 전공을 살려 한국적인 찬송가를 만들 결심을 신학교 다닐 때부터 하였는데, 1989년에는 우리가락찬송가 100곡집을 내고, 2011년에는 찬송가 330곡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작년에 은퇴하면서 찬송가 1,000곡 작곡을 목표로 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곡씩 작곡하면 15년이 걸리는 대장정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저는 1,000곡 찬송가 숫자를 채우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1 천곡을 통하여 한국적인 찬송가의 모델이 세워지고 한국교회 문화유산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적인 찬송가는 멜로디를 5음 음계로 작곡한 찬송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법론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한국 찬송가는 한국교회 140여 년의 역사를 담아내야 합니다. 즉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찬송가로 만들어져서 한국교회에서 불려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현재 교인 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정작 삼일절에 부를 찬송이 없고, 광복절이나 6.25전쟁을 위한 예배에 부를 찬송이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나 손양원 목사를 위한 찬송가도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한국찬송가에 한국교회사가 담겨 있어야 진정한 한국찬송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목표로 찬송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 현재 찬송가에 문목사님이 만든 곡들이 있는데 어느 곡들인가요?

 

A: 현재 사용 중인 찬송가에는 제가 작곡한 세 곡이 들어 있습니다.

48장 거룩하신 주 하나님

418장 기쁠 때나 슬플 때나

556장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는

 

Q: 문 목사님은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슈바이처 박사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전통교회에서는 그를 이단이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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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박사와 부인 헬레네 

 

A: 슈바이처 박사는 제가 한국에서부터 호감이 가고 본받고 싶은 인물이었습니다. 음악과 신학을 같이 한 분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슈바이처에 관한 책은 거의 다 소장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새로 깨달은 것은 슈바이처가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따르면, 그는 예수를 자각적 메시아로 보고 있습니다.

 

즉 예수가 나이 30세가 되었을 무렵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하여 내가 메시아가 되어야겠다라고 결심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위해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활동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통 교회의 주장인 태생적 메시아교리와 정면으로 위배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태어나면서부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그렇게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정통 교리적 관점에서 보면 슈바이처는 이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를 연구하다 보니까 정통 교리의 수호자인 저에게는 벽에 부딪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비록 예수를 자각적 메시아로 알고 믿었지만, 그는 그가 믿는 메시아 예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점입니다

 

그가 유럽에서 안정적인 출세와 부와 명예의 길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간 것도 그가 믿는 예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럽에 왔다가 풀려났을 때, 그는 노후를 편안히 유럽에서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거기서 죽습니다

 

그가 믿는 메시아 예수의 제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비록 자각적 메시아로 예수를 믿었지만, 그의 믿음 안에서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슈바이처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며, 예수를 태생적 메시아로 믿는다는 사람들은 슈바이처만큼 그들이 믿는 믿음 안에서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돈과 명예와 출세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의 제자로 살려고 노력했던 슈바이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좋아하고 명예와 출세의 자리를 탐하며 예수의 제자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예수를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슈바이처는 잘못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제자로 살지 않으면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그런 점에서 슈바이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신앙인들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어려워진 이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사는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Q: 문 목사님은 그동안 독일에서 신학과 음악공부 10,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 총장 14, 교회 담임목사 13년을 하셨습니다.

 

2023년 목사 안수 40주년에 은퇴하고 평생을 교회와 학교 안에서 살다가 그 사회를 떠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나 교회를 전반적으로 어떻게 보시나요? 

 

A: 작년에 은퇴하면서 자유로운 몸으로 한국 교회 전체를 보고 진단하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한국 교회는 많이 병들어 있고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는 사회에서 게토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종교 전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교회는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마치 관중 없는 경기장에서 자기들끼리 운동 시합을 하고 상을 주고 박수 쳐 주는 듯한 한심한 상태입니다

 

교회가 세상과의 대화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한데 저는 이것을 문화라고 봅니다.

 

어떤 종교가 어느 지역에 토착하여 뿌리를 박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도 운동과 윤리 운동과 문화 운동의 세 가지 면을 골고루 갖추어야 합니다

 

교회가 전도와 윤리에 대하여는 강조하고 있지만, 마지막 과제인 문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기독교 문화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예배당이 많이 있으나 후일에 문화재가 될 만한 건물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전통문화에 대한 수용에 아직도 적극적이지 못하여 토착 종교로서의 이미지가 약합니다. 문화적 응집력이 없기에 사회 곳곳에 기독교인은 많으나 그 힘이 모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종교 전쟁은 이미지 전쟁입니다. 그리고 이미지 전쟁은 곧 문화전쟁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교리적인 분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종교의 이미지가 어떠한가에 자기의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 개선에 문화는 더 없이 좋은 수단입니다

 

문화를 통한 이미지 개선이 없이는 한국 기독교가 가진 도덕성은 빛을 보지 못하며 사회는 나쁜 이미지 속에서 계속 기독교를 비판적인 눈으로 볼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지 개선 없는 전도 운동은 사회에 역겨움만을 더하여 기독교를 오히려 외면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돈을 투자해야 할 곳은 건물이나 전도, 구제만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지만 문화를 통한 이미지 개선 없이는 무용지물입니다

 

문화에 투자하고 문화 운동에 동력을 제공하여 실추된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제가 찬송가 1,000곡을 작곡하겠다는 의지도 이 시대의 교회 문화적 유산을 남기고자 하는 의지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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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의 한국 교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A: 예전에는 한국교회를 진단하는 담론의 공식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국교회 문제 있다로 시작해서 그래도 교회에 희망은 있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대로 가면 망한다는 사람도 있고, 한국 교회는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절망적인 미래적 진단 속에서 한국 교회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 교회를 비난하고 흉을 보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었습니다

 

소위 안티 기독교 세력들이 교회를 욕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더 큽니다

 

이들은 대부분 교회를 사랑해서 매질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난의 목소리에는 위선이 있습니다. , 무너지는 교회의 책임이 에게 있고, ‘는 아니라는 교만입니다

 

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는 것이고, ‘때문에 교회가 망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나 때문이요.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회 안팎의 사랑 없는 비난과 매질에 한국 교회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 교회가 사회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사를 대할 때 성직자로 예를 갖추었고, 장로나 권사는 거짓말하지 않는 선한 사람들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직자로서의 목사 상이 퇴색하였고, 교인들끼리도 서로의 말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목사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장로가 사기를 치고, 권사, 집사가 이권에 눈이 어두워 신앙 양심을 팔아먹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허물어지는 도덕성과 함께 무너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 교회에 치리가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죄를 지으면 처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사나 장로나 평신도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치리에 모두 복종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교회에 치리가 사라졌습니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목사와 장로는 면죄부를 받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를 하면 그 사람이 오히려 왕따를 당하는 것이 교계의 풍조가 되었습니다

 

치리가 무너지면서 한국 교회는 함께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교회의 터전인 예수 그리스도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는 절망적인 미래가 없고, 위선도 없고, 부도덕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를 허물고 예수의 반석 위에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다른 활동도 활발히 하시는데 이자익 목사 기념회가 눈에 띕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어떤 분인가요?

 

A: 이자익 목사는 1879년 생으로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그는 생계를 위해 김제로 가서 그곳의 지주였던 조덕삼의 마부가 되었고, 청년기에 접어든 이자익은 장사로 안정된 생활기반을 마련하여 독립하였습니다.

 

1904년 최의덕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는데, 1905년 함께 믿은 조덕삼 지주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하여 두정리교회(금산교회의 전신)가 태동하였습니다

 

이자익은 1906년 세례를 받고, 190835일 금산교회 초대 장로로 임직을 받았습니다

 

이때 지주 조덕삼보다 먼저 장로로 피택된 일, 조덕삼이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머슴 출신인 이자익을 장로 임직 시켜준 일은 한국교회사에 최고의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자익은 장로가 된 후에 최의덕 선교사와 지주 조덕삼 장로의 후원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615일 졸업하였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장로교가 분열되기 전 세 번의 총회장을 역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1952년 친구 목사인 함태영 부통령으로부터 교통부와 체신부 장관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오직 목회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시골교회를 지켰고, 고아와 마부라는 환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교만하지 않고,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던 영원한 한국교회의 어른이고 신앙의 거목입니다.

 

이자익 목사는 2004년까지 역사 속에 묻혀있던 한국 교회 어른이셨습니다

 

이자익 목사에 대하여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던 2004년 당시 대전신학대학교 총장이었던 제가 학교 50년사를 쓸 자료를 모으면서 초대 교장이 이자익 목사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대전신학대학교 안에 <이자익 사료관>을 마련하고, 후손 대표인 이규완 장로와 함께 의논하여 이자익 목회자상’을 제정하였는데, 이를 위한 조직으로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가 이자익 목사가 활동하였던 대전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습니다.

 

이자익 목회자상은 교계의 유명 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상이 아닙니다

 

이 상은 이자익 목사님의 정신을 받들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농촌교회와 선교지를 섬기는 종들을 발굴하여 세상에 소개하고 격려하는 상입니다. 현재까지 2년에 한 번씩 수상식을 개최하여 20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Q: 문 목사님은 한국 찬송가개발원 원장, 한국국민악회 회장, 베아오페라예술원 이사장, 한국 음악평론가 협회 공동 이사장등을 하시고 있습니다. 각각 어떤 단체인가요?

 

A: ‘한국찬송가개발원은 제가 찬송가 1,000곡을 작곡하기로 결심하고 만든 것입니다

 

일년에 3-4회 신작찬송가 발표회를 열고 찬송가 관련 책을 발간하고 교육을 시키는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필요한 인력과 경비를 후원회 형식으로 모아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국민악회는 순수 작곡가 모임입니다

 

일년에 1회 작곡발표회를 개최하고 악보집을 발행하며 한국 창작 음악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1980년 고 김형주 선생의 주도 아래 창립되었고, 현재까지 300곡 이상의 신작작품과 60명 이상의 작곡가를 배출하였습니다. 올해는 지난 67일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에서 제40회 작곡발표회를 가졌습니다.

 

한국음악평론가협회는 음악학자들 모임입니다

 

여러 나라에서 공부한 음악학자들이 모여 2개월에 한 번씩 준비해온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을 합니다. 현재는 중앙대 명예 교수인 전인평 선생의 제안으로 서양음악과 국악을 통합한 음악이론서를 만들고 있습니다.

 

베아오페라예술원은 순수 성악교육을 위한 단체입니다

 

한양대 출신 테너 이동현 선생을 주축으로 개원하였고 한 10년 전부터 제가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성악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전문 성악가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에 오페라 공연에도 출연하고, 정기 연주회도 갖고 있습니다. 사무실은 양재동에 있습니다.

 

 

Q: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데 건강 잘 돌보시고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문화창달을 위해 계속 애써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A: 저는 찬송가 작곡과 더불어 칼럼을 쓰고 찬송가 관련 방송을 하고,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도 하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실 때까지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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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목사의 작품들, 아래는 캘리그래피 '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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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사무실 로비에서 - 2024 08 26 

 

*문성모 박사 아카이브: 

https://blog.naver.com/msm8012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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