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네리와 근처 병원을 모두 돌아보았지만 요남을 찾을 수 없었다.
은근히 술을 많이 마셨는지 뒷골이 무거웠다.
이제 요남이 제시간에 돌아오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고 어디서 무사히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네리가 빌립 집사를 빠르면 오늘 오후라도 만날지 모른다니까 무슨 소식이 있을 것이다.
아침에 잠을 잤다가는 언제 깰지 몰라서 밤을 꼬박 새운 바라바는 헤로디아의 궁전으로 향했다.
이 와중에 무슨 일로 그녀가 부르는지 은근히 짜증이 났다.
시녀장이 그를 반갑게 맞이하여 왕비의 집무실로 바로 안내했다.
헤로디아가 무슨 서류를 보고 있다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바라바, 어서 와요.
이렇게 일찍 온다고 했으면 화장을 좀 더 하는 건데, 호호.”
오전 햇살에 비친 그녀의 눈가는 주름살을 감출 수 없었고 몇 가닥 흰머리도 눈에 띄었다.
바라바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우선 이 목록 좀 한번 봐요.
내년 유월절에 정결 예식을 치르는 순서인데 이런 것을 정확히 정해 놓지 않으니까 혼선이 생기네.”
왕비가 건네준 양피지에서 제비꽃 향내가 물씬 풍겼다.
성전 예식의 정결 순서: 1)대제사장 2)일반제사장 3)레위인 4)순수혈통의 유대인 5)제사자의 혼외 자녀 6)이방인 개종자들 7)사생아나 고아들 8)이방인들(사마리아 사람 포함)
바라바가 다 읽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그 정도면 되겠어요?”
“네, 저는 이런 문제는 잘 모릅니다.”
그의 대답이 투박하게 들렸다.
“그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왕비가 양피지를 돌려받은 후 그를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바라바가 로마에 가서 대제사장 의복인 ‘에봇’을 찾은 후 안전하고 신속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임무였다.
로마 원로원의 맥슨 의원을 만나면 그가 에봇을 건네줄 것이고 모든 협조를 할 것이니 하루속히 다녀오라는 것이다.
“제가 지금 로마로 갈 수는 없습니다.”
바라바가 강력히 거부 의사를 밝힌 후 오늘 예정되었던 동료들의 석방이 요남의 실종으로 무산되었고 그들이 석방될 때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아, 그래서 우리 바라바 님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셨구나.
그 요남의 보증을 내가 서면 되겠네.
칼로스 천부장에게 내가 요남이 돌아온다는 보증을 설 테니 안토니아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석방시키라고 할게요.
천부장이 마침 오늘 여기로 온다고 했으니 늦어도 내일은 모두 석방될 거예요.”
무슨 그런 일로 고민했냐는 듯이 그녀가 싱글거리며 계속 말했다.
“늦어도 3~4일 안에는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해요.”
갑자기 바라바는 다시 로마로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루브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맥슨 위원께 물어보면 루브리아의 안부도 알 수 있을 것이오. 호호.”
왕비의 말에 바라바는 루브리아의 서신에 나온 원로원 의원이 맥슨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생각을 간추린 후 바라바가 입을 열었다
“왕비님께 또 한 번 도움을 받게 되네요.
지난번 로마에 가시기 전에도 왕비님의 선처로 제가 풀려나오게 되었습니다.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때는 나보다도 루브리아가 더 애를 많이 썼었지.”
헤로디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사실은 저도 이번에 동료들이 나오면 로마에 갈 생각이었습니다.
지난번 원로원에 올린 청원서 문제도 있고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선생님도 저를 만나자고 하셔서 로마에서 며칠 머물러야 합니다.
에봇만 받아서 급히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음, 그럴 계획이었군요… 할 수 없지.
그럼 가능한 한 빨리 일을 보고 오도록 해요.
절대 비밀리에 안전하게 가져오는 것이 중요해요.
사람들에게는 내가 지난번 직접 가져왔다고 할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칼로스 천부장은 예루살렘에 갑자기 왜 오나요?”
바라바가 며칠 전 그와 만났을 때는 전혀 그런 계획을 듣지 못해서 물어본 것이다.
왕비의 입술이 잠깐 시간을 두고 움직였다.
“성전 경비대와 회의가 있어서 오는 거예요.”
사마리아 토벌군이 곧 군사행동을 할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극비사항이고 혹시 바라바가 로마에 가는 계획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하튼 다행입니다.
빨리 왕비님께서 말씀을 해주셔서 내일 오전에는 틀림없이 모두 풀려나면 좋겠습니다.
지금 동료 중 한 사람은 근육이 수축하는 병을 앓고 있어서 수감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칼로스만 승인하면 오늘 밤이라도 내보내라고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지금 안토니아 감옥으로 가서 동료들을 만나겠습니다.
오늘 오전 석방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안 되니까 모두 굉장히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헤로디아가 아쉬운 듯 입맛을 한 번 다신 후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점심이라도 같이하려고 했는데 잡을 수가 없네.
그럼 그들의 석방을 두 눈으로 보는 대로 다시 한번 들어와요.
로마로 떠나기 전에 환송회라도 간단히 해줘야지. 알겠지요?”
왕비의 눈에서 작은 불꽃이 일어나는 듯했다.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라바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장이 생글거리며 한마디 했다.
“생각보다 일찍 잘 오셨어요. 여동생에게 전달한 서신은 받으셨지요?”
“제 여동생요? 아, 네.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시녀장이 만족한 웃음과 함께 바라바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오른 팔목에 감겨있던 은팔찌가 눈에 익었는데 그것이 루브리아의 것이라는 것은 안토니아 감옥에 거의 다 가서 기억이 났다.
성문 앞에는 꽤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갇혀있는 동료들의 가족인 성싶었다.
대부분 추레한 옷에 얼굴에는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로벤을 만나서 하루만 더 기다리라는 말을 하려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들이 서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나오기는 틀린 것 같아.”
“바라바 단장이 개인적으로 보증한 사람이 어제까지 돌아와야 하는데 도망을 쳤다나 봐.
그런 사람을 믿은 바라바 단장이 더 문제지 뭐.”
그들의 말이 바라바의 가슴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