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에게 흔쾌한 대답을 못 하고 돌아온 루브리아는 머리가 복잡했다.
헤로디아 왕비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한번 말려들기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운명에 휩싸이게 된다.
루브리아는 철이 들면서 주위에 있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사는 사람들이 별로 부럽지 않았다.
그들의 삶이 매일같이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파티로 흥겨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칼과 창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그들의 가슴을 노리는 사람들이 단도를 품고 불쑥 나타날지 몰라 늘 불안에 떨었다.
큰 부자들일수록 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았고, 술과 향락에 취해 매일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했다.
“마차는 준비되었어요. 아가씨.”
유타나가 사라와 함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루브리아는 베다니에 가기 위해 자주색 외출복을 입고 오랜 만에 화장을 했다.
아직 얼굴이 핼쑥했고 눈이 좀 빨갛지만, 조금씩 회복된 느낌이었다.
“예수 선생님이 오늘은 종일 베다니에 계신다니까 여기서 점심을 하고 가시지요?”
사라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래, 거기도 사람들이 많을 텐데 우리 식사까지 신경 쓰게 할 수 없지.
탈레스 선생님과 맥슨 님도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고 가시자고 해.”
“네, 그럼 제가 두 분께 말씀드리고 먼저 내려가 자리를 잡고 있을게요.”
유타나가 방에서 나간 후 사라가 넌지시 물었다.
“왕비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다녀오신 후 좀 피곤해 보이세요.”
“음, 사실은…”
루브리아가 왕비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라의 가슴이 갑자기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만약 루브리아 언니가 칼리굴라와 인연이 된다면 바라바 오빠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
“그랬더니요?”
“펄쩍 뛰면서 곧 카프리섬으로 같이 가야 한다고 하셨어….”
그래서 아버지와 같이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다마섹의 팔미라 신전을 구경 갈 계획이라고 했더니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셨어.”
“왕비 님이 정말 어이가 없으셨겠어요.”
사라가 자기도 모르게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식당에 내려가니 유타나가 자리를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약 손님이 꽉 차서 간신히 한자리 잡았어요.
우리 번개 가오리도 잘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요.
맥슨 백부장 님도 그런 물고기가 있냐고 관심이 많으세요. 호호.”
맥슨이 무슨 말을 막 하려는데 종업원이 그에게 와서 물었다.
“맥슨 백부장 님이시지요?”
“그런데요?”
“지금 로비에서 롱기누스라는 분이 백부장 님을 급히 만나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어요.
식사 끝나시면 다시 오라고 할까요?”
“아니요. 지금 곧 간다고 전해줘요.”
그가 온 것이 좋은 소식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맥슨이 루브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히 일어나 나갔다.
식당 안은 유월절을 이틀 앞두고 손님들로 넘쳐났다.
유타나는 지난번 맥슨에게 십자가 처형에 관해 물어본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은근히 불안해졌다.
사라가 배가 고프다며 음식을 많이 시켰다.
양파 수프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식탁 위에 놓일 때 맥슨이 돌아왔다.
독수리 깃발의 독수리 눈이 지워져서 바라바의 특사가 어렵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루브리아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다니는 왕비님 만나고 올 테니 그때 가기로 해요.”
사라는 자리에서 일어날 정신도 없었다.
하나님은 깨진 접시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더니 한 번 더 산산조각이 났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이런 건가 하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이르면 내일이나 모레라도 사형이 집행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눈이 감기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루브리아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녀에게 미안했다.
아버지께도 이런 불효가 없었다.
감방 안의 공기가 어둡고 침침한 가운데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머리가 텅 빈 것 같고 사라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저와 같이 잡힌 동료들은 어떻게 될까요?”
바라바의 목소리가 좁은 방의 횃불을 흔들듯 울렸다.
아까 칼로스를 만났을 때 하려던 말이 가슴 속에서 맴돌다 저절로 나왔다.
“며칠 전 알아봤을 때는 아직 판결이 안 났는데 이제 곧 나겠지요.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 될 거요.”
살몬이 바라바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너무 절망적으로 생각지는 말아요.
롱기누스가 급히 누구에게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무슨 방법을 강구할 거예요.
일단 사형 집행만 연기되면 유월절 연휴에 시간을 벌 수 있어요.”
지난번 루브리아가 누군가를 통해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알았으나 이런 상황에서 무슨 대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을 번다고 무슨 방법이 있나요? 여기서 탈출은 불가능해요.”
요남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맥없이 말했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흐른 후 바라바가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이삭에게 내밀었다.
“이 서신은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주세요.
니고데모 님이나 이삭 선생님이 곤란해질 수 있어요.”
이삭이 서신을 말없이 받았다.
“그리고 이 은목걸이는 에세네파의 보물이라고 하는데 혹시 제가 잘못되면 에세네파 믿을만한 사람에게 전달해 주세요.”
바라바가 목걸이도 끌러주니 분위기가 비장해졌다.
잠시 후 이번에는 요남을 바라보고 말했다.
“요남은 나중에 혹시 나를 못 만나면 가버나움에 있는 광장호텔에 가서 나발이라는 사람을 찾으면 열성당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어두컴컴한 방안이지만, 요남의 눈동자에서 물 한 방울이 반짝이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