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469화 ★ 시 낭송
칼리굴라가 긴 소파 뒤에 서 있는 루브리아를 그제야 짐짓 바라보았다.
황제는 오늘 일부러 카이소니아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다.
게멜루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황제는 어린 것이 루브리아를 언급한 자체가 불쾌했다.
“자, 이제 식탁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네로의 방에서 나온 아그리피나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식탁의 중앙에 황제가 앉고 참석자들이 옆에 앉으니 의자 2개가 남았다.
“경호실장과 루브리아도 이리 와서 앉으세요.”
칼리굴라의 입에서 조금 전 세네카가 예상한 말이 나왔는데 다음 말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루브리아가 내 오른쪽에 앉고 카시우스 실장이 내 왼쪽으로 오세요.”
심통 맞은 얼굴로 황제가 그렇게 말하니 게멜루스와 클라우디우스가 서둘러 일어나 한 자리씩 옆으로 옮겼고 모두 한 자리씩 옮기게 되었다.
루브리아가 잠시 당황했으나 자리를 비워둘 수도 없어서 황제의 옆에 앉았다.
아그리피나가 오빠가 하는 행동이 어이없다는 듯이 루브리아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벽 쪽에 서 있던 이집트 옷을 입은 기타라 연주자가 부드럽게 악기의 줄을 튕기며 편안한 음악을 연주하자 주방에서 여러 명의 하얀 옷을 입은 시녀가 한 줄로 음식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칼리굴라가 옆에 있는 루브리아에게 상체를 기울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음식은 루브리아가 미리 점검을 했으니 안심하고 먹어도 되겠지.”
그는 다른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싱싱한 석화를 쩝쩝 소리를 내며 껍질째 들고 먹었고 향기 나는 송로버섯을 마구 입에 집어넣었다.
다른 참석자들도 앞에 있는 음식을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음악이 한 곡 끝날 무렵 아그리피나가 앞에 놓여 있는 와인잔을 은스푼으로 살짝 때려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결례를 했습니다.
식사 시작 전에 황제 폐하의 건강과 로마제국의 번영을 위해 건배를 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백 포도주잔을 들며 건배를 제의했고 황제는 입안에 음식이 있는 그대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오늘 모임의 주인공인 우리 네로를 위해 황제께서 축배를 제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로 엄마의 속셈이 드러났고 순간 칼리굴라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신이 결례를 했다면서 사실은 아기에게 축복의 건배를 하지 않는 오빠를 은근히 비난한 것이다.
황제가 하얀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까 아기를 봤을 때 내가 속으로 축복을 해줬는데 뭐.”
아그리피나의 얼굴이 굳어지고 분위기가 썰렁해졌으나 황제는 음식을 계속 먹었다.
옆에서 루브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아그리피나 님이 계속 서 있는데 네로 아기를 위해서 건배를 해주세요.”
그가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못 이기는 척 잔을 들며 말했다.
“의전에 대해서는 루브리아 의전관의 말을 들어야겠지.
네로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고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
맥 빠진 듯한 황제의 말이지만 체면을 건진 아그리피나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아무도 대화하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섞여서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젊은 황제는 푹 삶은 돼지고기 살과 노란 기름이 반지르르한 꿩고기를 계속 뜯어 먹었고, 적포도주를 마신 후 트림을 했다.
“황제 폐하,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그동안 외웠던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낭송할 기회를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와인을 마셔서 둥그런 얼굴이 벌게진 도미티우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칼리굴라가 허락의 표시로 와인잔을 가볍게 들었다 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미티우스가 좌우를 둘러본 후 기타라 연주자에게 신호를 보냈고 미리 준비된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사랑의 위대함은 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으로써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랑은 행복의 힘입니다.”
부드럽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그의 시 낭송이 계속되었다.
“지난날 당신이 나를 보았을 때 나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이름 지을 수 없이 어렸으므로 나는 그리움 속에서 살아왔으나 이제 무엇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자랐습니다.
내가 바로 잘 익은 포도주 향기며 찬란한 5월이며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황제가 입술을 앞으로 쑥 내밀며 눈을 반쯤 감고 도미티우스의 시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조용히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기도 했다.
굵고 부드러운 도미티우스의 목소리에 한층 더 감정이 실리며 연극배우 같은 동작까지 음악에 맞추어 해나갔다.
루브리아는 오늘 만찬이 끝나면 기회를 봐서 황제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눈앞에서 시를 읊는 남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바라바의 이름으로 로마 원로원에 제출한 성전세 인하 문제를 거론하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라바의 시민권을 부탁하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성전세 문제가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것이 바라바의 생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맥슨 백부장의 경우를 보더라도 바라바를 직접 거론하며 시민권을 부탁하면 칼리굴라의 반응이 어찌 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부담이 있었다.
갑자기 옆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시 낭송이 끝나고 황제가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도미티우스가 만족한 표정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시녀들이 각종 디저트를 날라오기 시작하는데 황제가 다시 루브리아에게 상체를 가까이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만찬이 끝나고 내가 루브리아에게 따로 할 말이 좀 있소.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폐하!”
루브리아로서는 너무나 잘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