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471화 ★ 므네모시네 여신
만찬이 끝나자 황제는 동생과 할 말이 있다며 다른 참석자들을 먼저 보냈다.
도미티우스의 서재로 자리를 옮긴 칼리굴라는 동생 대신 루브리아를 혼자 들어오라고 했다.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서재로 들어오는 루브리아의 손에 색다른 디저트가 들려있었다.
“그게 뭐요? 아까 식탁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
술을 많이 마시면 오히려 얼굴이 하얘지는 황제의 눈빛이 반짝였다.
“대추야자라고 합니다. 유대 땅의 특산물인데 그중에서도 여리고라는 곳에서 생산되는 제일 크고 맛있는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온 양이 얼마 안 돼서 만찬 식탁에는 내놓지 못했어요.”
루브리아의 설명에 황제가 만족한 미소를 지며 굵고 붉은 대추야자를 한 개 입에 넣었다.
“음, 생긴 것보다는 꽤 달고 맛있구먼.”
대추야자씨를 입에서 바로 바닥으로 뱉으며 칼리굴라가 주위를 슬쩍 바라보았다.
누가 있든 없든, 은밀한 말을 하기 전 그의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오늘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 중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오?”
루브리아가 얼른 대답을 못 하자 그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게멜루스도, 내 동생도, 삼촌도 아니고 바로 의전관 루브리아 당신이오.”
얼굴은 빨갛지 않지만 황제의 목소리나 하고 싶은 말을 직선적으로 하는 것으로 봐서 술이 꽤 취한 상태가 틀림없었다.
칼리굴라가 약간 양쪽으로 벌어진 눈동자의 초점을 루브리아의 입술에 맞춘 다음 장난꾸러기 같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오늘 본 돼지 새끼 같은 네로가 목에는 뱀 자국도 있더군.
그럴 리도 없지만, 그런 애가 만약 앞으로 황제가 된다면 로마를 크게 위태롭게 할 인상이요.
내 동생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흐흐.”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루브리아를 보며 황제가 대추야자를 하나 더 집어 입에 넣는데 손가락의 황제 인장이 안쪽으로 돌려져 있었다.
“이걸 먹으니까 생각이 나는데 로마의 속국 중 황제 숭배를 가장 거부하는 놈들이 유대민족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루브리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
“유대 사람들은 도시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도시 사람들은 황제 폐하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음, 시골 사람들이 대개 공부를 안 하고 들은 게 없어서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모르고 황제 숭배를 안 하는구나.”
칼리굴라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사람들이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몇 년씩 고생해도 세금이 너무 많아서 먹고살기 어려운데 황제 숭배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가 없겠지요.
그 중에서도 성전세에 대한 부담이 커서 얼마 전 유대인들이 원로원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황제가 열심히 말하는 루브리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루브리아가 살며시 심호흡을 하고 계속 말했다.
“폐하께서 그들에게 성전세 인하를 허락하시면 농촌의 유대인들도 감읍하여 황제 숭배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입니다.
세금은 누구에게나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데 새 황제 폐하의 큰 선물로 생각할 테니까요.”
칼리굴라가 입을 앞으로 쑥 내밀고 둥그런 눈동자를 위로 몇 번 굴렸다.
그의 입에서 굵은 대추야자씨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러니까 루브리아의 말은 내가 그들에게 성전세 인하를 허가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군. 그렇지요?”
“네, 폐하. 제가 유대 땅에 몇 년 있어 본 경험으로는 그들은 무력으로 누르는 것보다 잘 달래주면 더 말을 잘 듣는 민족이라 생각합니다.”
“음, 루브리아 의전관이 그렇게 건의하니 그런 방향으로 생각해 보겠소.
원로원에서 청원서가 올라오면 다시 알려주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유대인들이 폐하의 은덕을 찬양할 것입니다.”
루브리아의 목소리가 설레는 기쁨으로 흔들렸고 젊은 황제의 눈에는 밝고 환한 모습의 그녀가 오늘따라 더욱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오늘 내가 루브리아에게 중요한 부탁이 하나 있소.”
“부탁이라니요, 폐하. 지시만 내리시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루브리아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이지….”
칼리굴라가 황제의 반지 인장을 위로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루브리아는 ‘므네모시네’ 여신이 누군지 알지요?”
“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억의 여신’ 아닌가요?”
“맞아요. 아까 도미티우스가 읊던 시에서처럼 지난날 내가 당신의 어린 시절을, 또 당신이 나의 어린 시절을 잊지 않은 것은 모두 기억의 여신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에게 므네모시네는 이제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게 되었소.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는 제우스 신과 동침하여 7명의 뮤즈를 제우스를 위하여 생산한 것이오.”
여기까지 말하고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브리아가 앉은 의자 앞으로 다가왔다.
당황스러운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를 칼리굴라의 양팔이 감싸안으며 상체를 밀착시켰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며 술 냄새와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고 루브리아는 꼭 껴안은 젊은 황제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루브리아, 당신이 나의 므네모시네가 되어주시오.
7명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2~3명은 적어도 낳아주시오.
루브리아, 이것이 나의 부탁이오.
당신이 나의 찬란한 여신이며 전설의 주인공이오.”
두 개의 심장이 뛰는 소리만 크게 들렸고 루브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칼리굴라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잠시 포개진 후 그의 양팔이 풀렸다.
“내가 황제가 된 후 제일 많이 후회하는 것은, 아그리피나의 말을 듣고 당신과 결혼하지 못한 것이오.
제우스는 헬레나와 이혼하지 않았지만 나는 할 수 있소.
벌써 세 번째니까 한 번 더 이혼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