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473화 ★ 자기 십자가
네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한 사라가 다시 자기 생각을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본 그분은 하나님은 아닌 것 같았는데…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라고 불리는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나요?”
“네, 무엇보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며 당신의 신격화를 스스로 거부하셨지요.
유대민족의 신인 여호와가 예수 선생님일 수는 없으니까요.”
사라가 빵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특히 저는 선생님이 게세마네 동산에서 어스름한 새벽에 혼자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없어요.
얼마나 큰 고통과 괴로움을 호소하셨는지 아직도 그 광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릅니다.
다른 제자 분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요. 동산 아래쪽에서….”
“그래요. 네리 씨가 그때의 유일한 증인이지요.
그것을 제자분들이 모르나요?”
“몇 분들은 알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워요.
잘못하면 제자들이 '깨어있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듣고 잠만 잔 사람들이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요.”
사라가 비어 있는 네리의 잔에 포도주를 살며시 더 따랐다.
“네리 씨의 심정을 알겠어요. 그런데 제자분들은 왜 예수 선생님을 신격화 하는 건가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더 큰 기대와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나사렛파는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이루어진다는 대망론이 가장 큰 힘이에요.
그러다 보니 그 분이 신이거나 신의 아들이었다고 하면 훨씬 더 그럴듯하게 들리지요.
그분을 가까이서 못 본 사람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더 쉽게 그 말을 믿고 따릅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신이었고 그래서 부활하셨다는 거지요.
또 다른 이유는 최고 지도자가 신적으로 높아지면 바로 밑에 있는 제자들의 위상도 덩달아 같이 올라가고 권위가 막강해지는 겁니다.
신에게 직접 지시를 받고 신과 통하는 권위 말입니다.”
네리의 얼굴에서 고뇌의 흔적과 심지어 어떤 분노까지 느껴졌다.
“예수 선생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선생님 자신을 신격화한다면 그들은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를 만들게 될 겁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진실이 신화의 옷을 입고 왜곡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군요. 사실 예수 선생님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으셨을 거예요.
늘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지요.”
이 말을 하고 보니 사라는 ‘바라바’라는 의미도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둘 다 비슷한 뜻이고, 본명도 예수 선생님과 같은 ‘예수’라는 생각을 했다.
네리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계속 이어 나갔다.
“물론 그분을 한마디로 어떤 분이라고 정리하기는 쉽지 않아요.
옆에서 선생님이 하신 일을 같이 본 제자들도 서로 조금씩 다르게 기록한 경우가 많으니까요.
저는 갈릴리에서는 그분을 따른 적이 없지만,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는 계속 가까이 있었지요.
그 후에도, 부활하신 후에 막달라 마리아님에게 처음 보이신 후, 엠마오에서 저와 글로버 님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셨지요.
모두 처음에는 그분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저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부활하신 선생님의 모습은 우리가 봤던 예전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랜만에 마신 술로 네리의 볼이 발그레해졌고 사라도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아니 제 생각은 나사렛파에서는 너무 막연히 선생님의 재림을 곧 이루어질 일로 믿고, 그 후에 일어날 새로운 세상, 즉 가난한 자와 부자가 거꾸로 되고 로마군이 이 땅에서 물러나는 새 왕국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 하셨다는 말씀, 우리 중에서 죽지 않고 그분의 재림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씀을 근거로 하는 것이지요.
저도 그렇게 되면 참 좋겠지만 만약 가까운 시일, 그러니까 몇 날 혹은 길어야 몇 년 안에 그분이 안 오시면 기다림만을 위한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조용히 기도 중에 그분을 기다리며 세상과 벗하지 않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라가 처음으로 그에게 반론을 제시했다.
“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삶, 금식하고 동굴에서 기도하는 분들이 훌륭하게 보였고 지금도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런 삶은 예수 선생님의 가르침과 어긋날 수 있어요.
그들은 대부분 지극히 경건한 모습을 보이며 세상의 것과 어울리면 타락하는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예수 선생님은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셨지요.
선생님의 가르침에는 크게 두 가지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하나님의 사랑의 강물이고, 또 하나는 그분이 하늘나라라고 부르던 인간의 기쁨의 강물입니다.
저는 이 두 강물을 하나씩 따라가면서 때론 방황하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 그분의 모습을 떠올리며 저는 그분이 제 인생의 참된 스승임을 알게 되었지요.”
네리의 맑은 눈동자가 빙그레 웃으며 계속 이어 나갔다.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고 선생님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아주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분이셨지요.
그런데 그분의 추종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을 신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제사장들이 두려워하게 되었고, 결국 그를 로마 병정들이 십자가에 매달았지요.
그런데 그분은 역시 제자들이 기대한 대로 신이었습니다. 부활하셨으니까요.”
포도주를 한 입 마시던 사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고 네리의 말이 계속되었다.
“문제는 그분들이 생각하는 신과 제가 생각하는 신은 하늘이 땅에서 먼 것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엠마오에서 제가 보았던 예수 선생님도 신이 아니었고 선생님이었지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심지어 지금 어떤 제자들은 더 간편한 교리를 개발하고 있는데,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하여 주었다는 주장이지요.
저는 예수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죄 사함과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편승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며 믿기만 하는 것은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예수 선생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가 자신의 십자가가 되는 것이지요.
구원은 자기 십자가에서 옵니다.
그때 비로소 선생님의 *‘너희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사라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더 이상 예루살렘의 나사렛파 안에서 계속 지낼 수 없었고 네실인으로서의 언약도 별로 의미가 없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이상하게 쿰란에서 들었던 항아리의 화음 소리가 듣고 싶어지더군요.”
* 마태복음 10장 40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