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478화 ★ 니고데모와 이삭의 만남
유대 땅의 유대인들은 젊은 황제 칼리굴라에 대한 기대가 컸다.
갈릴리 지역을 30년 넘게 통치하던 헤롯왕을 단숨에 경질해 버린 것은 통쾌한 일이었다.
후임으로 온 아그리파 왕도 현지 사정을 잘 알았고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소문대로 일 처리를 소신껏 잘했다.
새 황제를 환영한 것은 유대 땅에 사는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제국 이전에 유대를 점령했던 그리스인들은 새 황제가 유대인들보다 그리스인들에게 더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두 민족의 갈등을 황제가 어떻게 판결하느냐에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무렵 예루살렘의 서부 지역 고급 주택가 니고데모의 저택에 손님이 찾아왔다.
여윈 얼굴에 긴 흰머리가 언뜻 초췌해 보였으나 눈빛은 맑고 또렷했다.
대문을 지키는 경비원에게 방문객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고 잠시 후 니고데모가 서둘러 직접 문 앞으로 나와 손님을 맞아들였다.
“이삭 선생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하시네요.”
“모두가 니고데모 위원님을 비롯한 주위 분들의 덕분이지요.”
“아닙니다. 진즉 나오셔야 했는데 제가 능력이 없어서 고생을 더 하셨지요.”
니고데모가 머리를 깊이 숙이며 언뜻 눈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헤롯왕이 바뀌고부터 곧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시간이 참 더디게 갔어요.
그 소식을 모르고 있었으면 더 좋을 뻔했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허허!”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과일과 포도주를 공손한 자세로 탁자 위에 놓고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니고데모가 붉은 포도주를 하얀 돌 잔에 가득 따르며 물었다.
“그동안 어둡고 추운 곳에서 술은 거의 못 드셨지요?”
“같은 방에 있던 사람이 감옥의 전직 간부였기에 가끔 옥졸에게 얻어먹었습니다. 허허.
포도가 많이 나는 계절에는 직접 담가서 만들기도 했지요.
그 사람 덕에 좀 편하게 지냈습니다. 저보다 몇 달 먼저 나갔지요.
그리고 또 잠깐 같이 있던 바라바라는 젊은 사람을 서신과 함께 보냈는데 만나셨지요?”
니고데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선생님 나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열성당에 연락을 해봤는데 지금 로마에 가 있다고 하네요.
아마 필로 선생을 만나고 있을 텐데 몇 달 후에는 돌아오겠지요.”
“잘 되었네요. 그런 젊은 사람이 로마에서 시야를 넓히는 좋은 경험을 하고 돌아오면 우리 유대민족의 앞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아그리파 왕은 내가 예전에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헤롯왕 밑에서 별 볼 일 없는 직책을 맡았었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고 야심이 많아 보였는데 드디어 소원 성취를 했네요.
비교적 시민들에게 인기도 있는 것 같고 황제와 친한 사이라니 오래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헤롯왕만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삭이 술잔을 입에 대고 목만 축이듯 한 모금 마시고 계속 말했다.
“니고데모 님도 이제 다시 산헤드린 의원으로 복귀하셔야지요.
제가 곧 아그리파 왕을 만나서 이 문제를 거론할까 합니다만….”
니고데모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는 이제 정치에는 환멸을 느낍니다.
하면 할수록 스스로 위선자가 되는 느낌이고 제힘으로는 거대한 제사장 세력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종교와 정치가 한 몸으로 뭉친 이 땅에서는 나사렛 예수 선생 같은 분이 나와도 곧바로 십자가에 처형되고 선이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악이 선을 악이라고 하면 악이 되니까요.
솔직히 지난번 제가 감옥에 안 가게 된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마친 후 니고데모가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무슨 말씀인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완벽한 정치체제나 완벽한 신학은 애당초 없습니다.
틀림없는 해설이나 해석도 없고 누구나 삶과 죽음을 함께 짊어지고 이 세상을 살아 나가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선과 악의 혼합체입니다.”
오랜 세월 그를 감옥에서 고통받게 한 악에 대한 분노가 이삭의 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니고데모에게 나직한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동안 감옥에서 묵상을 하면서 내 영혼 안에 있는 그늘진 구석과 모순을 보게 되었어요.
우리는 이 자리에 서서 신앙의 패러독스를 안고 살고 있는 겁니다.
논쟁으로 진실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항상 대치되는 양쪽의 근사한 논리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위험한 결정을 강요하지요.
언제나 약한 자들 편에, 희생자들 편에 서라는 소리입니다.
나사렛 예수 선생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소리를 듣고 순종했겠지요.”
듣고만 있던 니고데모가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네, 그분이 말씀하신 거듭나는 것이 그래서 어려운 일이지요.
선지자들은 언제나 억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쓰지만 우리는 늘 승리자의 편에 서고 싶고, 정의의 편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어 합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이삭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늘의 소리, 예수 선생이 들은 말씀은 ‘옳게 살아라’ 가 아니고 ‘서로 사랑해라’입니다.
‘실수하지 말고 편안히 살아라’가 아니고 ‘하늘의 소리대로 행동하라’ 인데 그러면 온몸이 그 행동을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어떤 일에 옳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옳은 사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매우 위험합니다.
누구든지 이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스스로 만든 허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 선생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반복됩니다.
도덕적으로 옳고 거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신앙의 이름으로 엄청난 광기를 불러일으키지요.
어느 세대나 진정한 성인들은 자기들의 성스러움에 무관심했고 본인을 성인으로 여기지도 않았지요.”
이삭이 잔을 들어 목을 축인 다음 이어나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빛과 어둠을 구별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어둠이 없다는, 어둠이 있으면 안 된다는, 그런 착각에 빠지면 안 되지요.
우리가 보고 있는 어둠은 언제나 우리 안에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예언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책망하는 자들이 바로 당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예언자 행세를 하면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