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483화 ★ 고린도
나폴리 항구를 떠난 무역선은 동남쪽으로 열흘간을 항해해 그리스의 고린도 항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라바와 호란에게 이번 항해는 지난번과 많이 달랐다.
화려하고 편안한 침실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휴식과 식사를 즐기기는커녕 하루 종일 발목에 차꼬를 묶고 배 밑창에서 노를 저어야 했다.
유대의 욥바항으로 직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와 다소를 들러서 가는 배라는 것을, 출항한 지 며칠 후에 알았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내륙을 잇는 항구 도시인 고린도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동쪽으로 가까이 아테네와 마주 보면서 에게해를 통해 아시아 지역과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를 거쳐 나폴리로 가는 지름길이다.
고린도는 약 2백 년 전 로마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잔혹하게 파괴된 도시였다.
로마군을 이끈 뭄미우스 장군은 무장 해제된 이 도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해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무수한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 당시의 참혹한 파괴로 고린도는 이후 거의 백 년 동안 잿더미 상태로 있었다.
이후 시저가 이 도시를 재건해 지중해의 무역 거점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퇴역 군인들과 로마의 하층민들을 이주시켰다.
고린도는 여러 문화가 섞이면서 빠르고 역동적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바라바와 호란은 곧 풀려나올 줄로 생각하다가 얼떨결에 배에 태워졌고 한번 바다로 출항하니 탈출할 방법도 없었고 탈출할 곳도 없었다.
로마 황제를 비난한 사실은 물론 없었고 마침 지난번 배에서 만났던 카시우스 근위대장이 반갑게 아는 척을 했는데 결과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루브리아 님이 알고는 있을지,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바라바는 노를 힘들게 저으면서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고, 오른 발목은 쇳독이 올라서 점점 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 배도 전투선을 개조했으며 빛이 잘 안 들어오는 갑판 밑창의 양쪽 끝으로 약 30명씩 노를 젓고 있는데 대부분이 노예 출신인 성싶었다.
로마가 천하를 지배하며 평화가 몇십 년 계속되자 노예의 가격이 급등했다.
수많은 전쟁을 통해 정복당한 나라의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오는 손쉬운 방법이 막혔기 때문이다.
배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고린도 항구로 입항하는 준비를 시작했다.
바라바가 노를 젓는 팔에 힘을 빼고 있는데 얼굴이 퉁퉁한 대머리가 갑판밑으로 쿵쿵거리며 내려왔다.
붉은 얼굴에 험상궂은 기색의 40대 사내인데 팔에 해골 문신을 여러 개 한 것으로 보아 해적 출신인 듯싶었다.
바로 뒤에 이 배의 갑판장이 따라 내려왔는데 어둠에 익숙지 않은 큰 눈을 두리번거리며 좌우를 살피더니 바라바와 호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머리의 불거진 눈알이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의 입가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흘렀고 갑판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머리가 다시 육중한 몸집을 날렵하게 움직여 계단 위로 올라갔고 갑판장이 바라바의 옆으로 와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내릴 것이다.”
그는 로마 근위대로부터 열흘 전 바라바와 호란을 인계받아 배에 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유대의 욥바항으로 가게 되어 있소.”
바라바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갑판장이 처음으로 바라바와 호란의 상처 난 발목에 연고를 발라주며 말했다.
“배에서는 내가 하는 말이 법이니까 물고기 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 하라는 대로 해야 해.”
그날 오후 바라바와 호란은 고린도 항구의 선착장이 내려다보이는 허름한 창고에 도착했다.
대머리와 그의 부하들이 양발을 사슬로 묶어서 두 사람을 끌고 왔다.
넓지 않은 창고에는 머리가 허연 노인 한 사람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영감, 이 두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시게.”
대머리의 목소리가 걸쭉했다.
그의 부하들이 창고 바닥에 나란히 박힌 쇠기둥에 바라바와 호란의 발목 쇠사슬을 그대로 연결했다.
대머리가 은전 몇 개를 노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 들어온 상품은 꽤 비싼 물건이니까 잘 관리하도록 하시오.”
노인이 허리를 숙였고 대머리와 부하들이 우르르 창고를 빠져나갔다.
잠시 후 호란이 노인에게 물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딥니까?”
노인의 얼굴에 창문으로 석양빛이 가늘게 비추고 있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두 사람을 슬쩍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는 고린도 항구의 뒷골목 물류창고일세.
취급하는 물건은 예전에는 밀이나 옥수수였는데 이제는 사람으로 바뀌었지.”
노인이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계속 말했다.
‘젊은이는 유대 사람이구먼.
그리스 말에 아직 약간 히브리 악센트가 남아 있군.
옆에 있는 젊은이도 그런 것 같고… 내가 지금은 늙어서 이 모양이지만 한때는 아테네에서 귀족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호란이 다시 물었다.
“음, 그건 철학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질문이지만 내가 쉽게 말해주지.
자네들은 노예로 팔려 온 거니까 곧 이마에 짐승처럼 낙인이 찍혀서 넓은 농장으로 가게 될걸세.
거기서 2~3십 년 황소만큼 많이 맞고 일을 하면 등허리가 휘게 되고 늙어서 일을 못 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지.
아니면 자네들은 아프리카의 광산으로 가서 금이나 은을 캐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너무 위험해서 농장으로 가는 게 나을 거야.”
노인이 말을 멈춘 후 허리를 숙여 바라바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네는 지금 보니 대단히 강한 눈빛을 가졌군.
체격도 꽤 훌륭하니까 어쩌면 노예보다는 검투사로 훈련을 받고 다시 팔려갈 수도 있네.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격투기장은 하나씩 있으니까….”
부리가 큰 갈매기 한 마리가 창문틀 위에 앉아서 깍깍거렸다.
“요즘 검투사들은 게르마니안이나 트라키안들이 많다네.
그놈들은 덩치도 크고 기름기가 많아서 칼에 찔려도 오래 버틸 수 있지.
![[크기변환]1검투사 Screenshot 2024-04-30 at 16.24.19.JPG](https://www.choiwonyoung.net/data/editor/2603/20260329062800_d051ba8bb67a74aacd4ecd2fb1d2b3e6_oxs1.jpg)
자네는 안 죽으려면 싸울 수밖에 없고, 관중들은 승자에게 환호하거나 패자에게 죽음을 요구할걸세.
처음 몇 번의 격투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도 결국은 상처가 덧나거나 상대방의 칼이나 창에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이지.
사람들이 격투기장의 모래밭에 놓인 자네의 주검을 이집트 사자에게 먹일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