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485화 ★ 다시 샘 솟는 희망
며칠 후 루브리아는 황제에게 올릴 두 민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필로와 아피온이 각각 제출한 서류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사건의 발생 원인과 주장을 객관적으로 살펴보았다.
알렉산드리아 폭동은 사실상 그리스인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젊은 황제가 즉위한 것을 계기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상권을 빼앗고 도시의 중심 지역에서 그들을 축출하기 위한 계획된 충돌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칼리굴라의 흉상을 들고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황제가 신이라며 유대인들을 비웃었다.
당연히 유대인들의 완강한 저항이 일어났고 이것을 플라쿠스 총독에게 보고하여 사건을 확대한 것이다.
총독은 젊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리스인들의 횡포를 묵인했다.
알렉산드리아 부촌에 있는 유대인 저택들이 화염에 휩싸였고 황제를 신으로 받들지 않는 제사장들이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했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자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무역과 금융 체계가 무너지면서 동방에서 가장 번성한 알렉산드리아의 경제가 반 이상 마비되었다.
유대인들이 물러나면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고 서민들의 경제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한 그리스인들도 당황했고 로마제국으로서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루브리아는 플라쿠스 총독을 일단 경질하고 신임 총독이 두 민족 간의 새로운 질서를 현지에서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건의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의전비서가 방으로 들어왔다.
“루브리아 의전관님, 유대 사절단의 필로 대표가 오셨습니다.
의전관님을 만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루브리아가 잠시 망설이자 비서가 덧붙였다.
“사람같이 생긴 이상한 기계도 가지고 오셨어요.”
지금 그를 만나는 것은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나 필로 선생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바였고 가지고 온 물건도 무언지 궁금했다.
필로 선생이 쇠로 만든 사람의 상반신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루브리아 의전관님,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선생님을 따로 좀 뵙고 싶었어요. 그 물건은 뭔가요?”
필로가 쇠로 만든 물건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놓으며 말했다.
“이것은 포도주 섞는 자동기계올시다.”
루브리아가 자세히 보니 얼굴과 팔이 달린 상체에 배 부분만 뻥 뚫려 있고 그곳에 포도주잔을 몇 개 놓을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포도주를 즐기신다는 소문을 듣고 제가 만들었는데 물과 포도주의 비율을 원하는 대로 늘 일정하게 섞는 포도주 비서입니다. 하하.
루브리아 님, 어떤 포도주를 원하시나요?
오른손은 적포도주, 왼손은 백포도주이고 가슴에 달린 버튼은 물을 섞는 비율입니다.
1/4과 1/3 그리고 반을 섞는 3가지가 있지요.”
“어머, 그렇군요. 저는 대개 백포도주에 물을 반 섞어서 마시는데요.”
선생이 왼팔을 위로 올린 후 가슴에 1/2이라고 쓰인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기계 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배 부분 공간에 놓인 은잔에 백포도주가 부어졌다.
잔이 거의 다 차자 왼손이 저절로 내려왔고 잔 밑의 받침대가 앞으로 쑥 나왔다.
필로 선생이 은잔을 루브리아에게 전달했는데 물의 비율이 적당했고 백포도주가 시원하기까지 했다.
“선생님은 철학책만 쓰시는 줄 알았는데 이런 기계도 발명하시네요.
저 몸통 안에 얼음도 들어있나요?”
“네, 백포도주를 주문하면 시원한 물이 섞이도록 얼음을 통과해서 포도주가 나옵니다.
얼음이 비싸지만 여기서는 그건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황제 폐하께서 재미있어하시겠어요.
제가 며칠 내에 보여드리겠습니다.
필로 선생이 정중히 루브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도 유대 땅에 2년 정도 있었어요.
거기에도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이 갈등이 많은데, 이번에 알렉산드리아 사태를 해결하면서 새로운 본보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좋은 말씀입니다.
현명한 루브리아 의전관님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날 듯하던 필로 선생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루브리아 님, 혹시 갈릴리에서 온 바라바라는 유대인을 아시나요?”
“어머, 선생님이 바라바 님을 어떻게 아세요?”
루브리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고 필로의 하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제가 얼마 전 그 젊은이를 동생 집에서 만났어요.
원래 유대에 있는 글로바 선생에게 소개를 받았었는데 이번에 여기서 만난 거지요.
우리가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 유대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같이 참석하겠다고 했는데 그 후에 연락이 없네요.
그 젊은이가 루브리아 님을 잠깐 언급했었지요.
로무스 장군의 따님인데 유대에서 글로바 선생을 같이 만난 적이 있다고…”
“네, 맞아요. 제가 바라바 님과 같이 글로바…”
루브리아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헛기침을 한번 한 선생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혹시 바라바가 어디 있는지 루브리아 님이 아실까 하고 물어보려 했는데…”
그녀의 고개가 푹 숙여졌고 눈물이 턱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선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음, 그럼 동생이 본 사람이 바라바일지도 모르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루브리아는 선생의 동생이 천국을 다녀온 사람인가 싶었다.
“바라바가 안 나타나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보름 전쯤 내 동생이 비슷한 사람을 봤다고 했어요.
고린도에서 무역하는 친구를 배웅하러 나폴리 항구에 나갔는데 바라바가 발목에 쇠사슬이 묶인 채로 배를 타고 있어서 참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도 많다고 생각했다는데 어쩌면 바라바가 맞나 보네요.”
“어머, 그게 정말이세요? 동생분이 바라바 님의 얼굴을 잘 아시나요?”
“그럼요. 두 번이나 만났으니 나보다 잘 알지요.
그리고 그 옆에 늘 같이 다니는 더 젊은 친구도 언뜻 봤다고 했어요.”
루브리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솟아올랐다.
“맞아요.
그 배가 고린도를 가는 배였다고요?”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브리아는 새로운 희망과, 동생분이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빠르게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