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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

소설

허구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진실의 목소리.
장편 「소설 바라바」를 비롯한 이야기의 숲.

소설 바라바

바라바 488화 ★ 사표 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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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바 488화 ★ 사표 반려

 

게멜루스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그의 시신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황제가 묻힌 황제의 능 한 켠에 안치 되었다.

 

실제로 황제가 된 적은 없지만 황위 계승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준 것이다.

 

그날따라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칼리굴라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가득했고 아그리피나는 눈물로 손수건을 흠뻑 적시었다.

 

로마 시민들은 하루 동안 애도의 시간을 가진 후 다시 일상의 행복한 시간으로 돌아왔다.

 

빵이 없어서 배가 고픈 사람이 없고 거의 매일 온갖 오락과 체육 경기가 시내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즐거운 나날이 계속되는 한 시민들은 게멜루스가 18살의 나이에 전차 사고로 죽은 것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

 

루브리아가 황제에게 장례식 때문에 지연된 보고서를 들고 들어갔다.

 

칼리굴라의 기분은 명랑했고 보고서를 훑어본 후 루브리아가 건의한 방향으로 두 민족의 갈등을 해소하도록 결정했다.

 

이집트 총독을 경질하고 유대인들이 받은 경제적 피해 일부를 보상해 주는 대신 유대인 독점 무역업종을 그리스인들도 참여해 이익을 나누도록 했다.

 

황제 숭배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모든 유대인 회당에서 정기적인 교육을 통해 엄히 시행토록 지시했다.

 

주요 업무가 끝나고 루브리아는 필로 선생이 가지고 온 포도주 비서를 황제에게 보여주었다.

 

칼리굴라는 물을 타지 않은 적포도주 한 잔을 뽑았고 루브리아는 전처럼 물을 반 섞은 백포도주 잔을 손에 들었다.

 

유대 사절 단장 필로 노인이 보기보다 아주 영리한 사람이네. 하하.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이런 선물을 보내는 것을 보니.”

 

황제가 한 입 마시고 기계를 보면서 개구쟁이처럼 슬쩍 웃었다.

 

재미는 있는데 한 가지가 부족하오.

 

포도주 비서의 얼굴 부분을 이왕이면 더 술맛이 나는 사람의 얼굴 조각으로 바꾸면 좋겠소.

 

. 지난번 세상 떠난 게멜루스가 좋겠군.”

 

루브리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끼치며 잔을 들고 있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 한 사람 얼굴을 더 만들어 교대로 술을 따르게 하면 더 좋겠소.

 

게멜루스를 총애했던 티베리우스 황제 말이오. 하하.”

 

칼리굴라는 자기가 한 말에 큰 소리로 웃었다.

 

루브리아가 따라 웃지 않자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이어 말했다.

 

사실 황제보다 신이 더 높으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신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나는 제우스신과 동급이니까이번에 유대인들도 그들의 신이 나보다 아래인 것을 확실히 안 것 같소.”

 

루브리아가 아무 말을 안 하는 것이 어색했는지 황제가 화제를 바꾸었다.

 

, 그리고 지난번 내가 부탁한 문제는 생각을 해 보았소? 므네모시네.”

 

칼리굴라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폐하. 그동안 신중히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폐하의 뜻을 받들기에는 아무래도 신체가 너무 허약합니다.

 

며칠 전에도 어지럼증으로 의전관 업무를 소홀히 했는데므네모시네는 아이를 7명이나 생산했으니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루브리아의 말이 두서가 없는 듯했고 끝이 살짝 떨렸다.

 

“7명은 안 낳아도 되오. 2~3명만 낳아도 충분해요.”

 

칼리굴라가 손가락으로 23을 만들어 눈앞에 흔들면서 말했다.

 

사실은 제 건강이 유대 땅에 있을 때부터 많이 안 좋았어요.

 

한번은 기절해서 1주일간 깨어나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사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칼리굴라의 움푹 파인 큰 눈이 처음에는 분노로, 곧이어 슬픔으로 바뀌더니 잠시 얼굴을 숙이고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고개를 든 황제의 눈은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다.

 

제우스신께 맹세코 나는 이 세상 모든 여자에게 황제로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나 루브리아에게만은 친구이고 싶소.

 

당신이 나를 떠나면 나는 인간 친구가 아무도 없어요.

 

건강이 나쁘다면 휴가를 내서 푹 쉬고 그 후에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내 주치의를 보내줄 테니 우선 건강을 회복하도록 제우스신께 빌겠소.

 

그러니 제발 이 사표는 도로 집어넣고 나중에 얘기하도록 합시다.”

 

칼리굴라가 사표를 집어서 루브리아에게 돌려주었다.

 

애원하다시피 만류하는 황제에게 사표를 다시 줄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럼 우선 좀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치의는 보내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를 오래전부터 치료해 온 의사가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루브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오랜 친구를 먼 나라로 떠나보내는 듯 그녀를 살포시 허그했다.

 

칼리굴라의 집무실을 나서니 짧은 순간에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느낌이었다.

 

일단 황제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고 그의 분노나 오해를 사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루브리아가 의전관실로 돌아와 보니 손님이 한 사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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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최고의 철학자이자 연설가 세네카 선생이었다.

 

선생님이 제 방엔 웬일이세요.

 

오래 기다리셨나 봐요.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폐하를 만나고 계셨는데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려야지요.”

 

루브리아가 비서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했고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제가 걱정되는 일이 좀 있어서 루브리아 님을 만나러 왔어요.”

 

세네카를 마주 보는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40대 초반으로 단아한 용모의 철학자는 절제하는 생활이 몸에 배어 눈빛은 맑았지만 하얀 얼굴이 다소 여윈 편이었다.

 

어제저녁 우리 집에서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 님과 히스파니아 총독 갈바 님이 같이 식사하셨어요.

 

게멜루스 님의 장례식에 오셨다가 떠나기 전에 모이셨지요.” 

 

루브리아는 두 사람 모두 만났던 기억이 났다.

 

시리아 총독은 맥슨 의원님과 친했고 갈바 님은 칼리굴라의 측근이었다.

 

두 분이 거의 1년 만에 로마에 와서 너무나 달라진 분위기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비서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고 선생은 살짝 입술을 적시었다.

 

이런 식으로 흥청망청 시민들의 인기만을 위한 정책을 계속하면 선황제가 남기신 막대한 재정 흑자도 곧 바닥을 보일 수 있습니다.”